“나는 절망한다”고 말할 때는 목적어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반면, “나는 희망한다”라는 말에는 명시적이든 아니든 뭔가의 목적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어가 필요하지 않는 절망이란 결국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신’이란 키워드가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다. 특히 속으로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배신자가 나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신뢰를 얻고 있는 사실을 참지 못하고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이다. 나는 먼저 배신당했지만, 너희는 반드시 나중에 배신당한다. 그러니 알아서 잘해라. 뭐 이런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멀리 있는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에 대해서 ‘배신’이란 말을 쓰지는 않는다. 함께 일해도 단순한 계약관계로 일한 사람에게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주고받는 사이이니까.....
오히려 가까운 사람,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함께 일한 사람, 혹은 실제로는 거리가 있더라도 내가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이란 말을 주로 사용한다. 넓은 의미에서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나의 생각이나 행동과 다를 때, 그 다른 점이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때 ‘배신’이란 말을 사용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보면 ‘배신’이란 말은 연애의 용어이다. 그것도 치기어린 연애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은 헤어질 때조차도 배신이라는 말보다는 용서와 긍휼함과 안타까움으로 물들어지지, 사랑을 속삭이던 달콤한 입으로 사랑의 저물녘, 어둠이 깔려가는 동네 어귀에서 저주를 퍼 붓지 않는다.  

성숙한 사랑이라면 서로의 입장이 달라지고, 서로가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았을 때, 혹은 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부터 상대방의 입장과 의견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듣고, 내 생각과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며 관계의 회복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말과 눈빛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갈라지기 시작하면 서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갈라질 수도 있다. 다만 그 사랑을 이어가려는 과정에서 서로의 진실성이 서로에게 느껴졌다면 두 사람은 각자 새로운 길을 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은 한 명이 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이 치기어린 사랑을 하는 데서 나타난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정신분석을 할 수도, 족보를 파고 들 수도 없어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끌려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차츰 사랑이 식어 가면서 두 사람의 바닥이 드러나는데 치기어린 사람이 떠날 때면 큰 문제가 없지만, 성숙한 사람이 떠나려고 할 때는 울고불고 매달리고, 홧김에 사고가 생기기도 하고, 루머가 돌고, 심지어 스토킹으로 비화되기도 하고...... 

정치도 마찬가지고, 특히 사람 중심의 조직인 협동조합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어쩌면 여러 명이 함께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자칫 하면 더 많은 좋지 않은 말이 돌아다닐 수도 있다. 다른 점이라면 정치는 권력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더 크게 더 격렬하게 공개적으로 파탄이 나게 되지만, 협동조합은 소수의 몇몇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편을 갈라 싸우기 십상이다.  

작은 협동조합,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끼리 혹은 임직원끼리 사랑이 식는 것은 살아가기 팍팍하고,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주로 발생하는 것 같다. 마치 가난한 연인들의 다툼이 주로 그런 이유로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 배신감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설혹 연애 초기에는 잘 보이려고 큰 소리도 쳤지만, 함께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마당에 큰 소리에 계속 매혹당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빈손을 드러내고 맨발을 보여주는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그러고 난 후에도 사랑이 식을 수 있지만, 적어도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함께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우며 그래도 지금보다 나은 소박한 미래를 함께 계속 이야기해 나가야, 서로서로를 조강지처로서 긍휼히 여기고 안타까움에 먼저 배려하지 않을까 싶다.  

규모가 큰 협동조합이나 협동조합간의 협동을 추구하는 큰 연대조직이나 2차 협동조합, 연합회의 구성원들끼리 사랑이 식으면서 ‘배신’이 운위되기 시작하면 정치에서의 그것과 비슷해진다. 크든 작든 나름의 권력과 자원을 둘러싼 겨룸이기 때문이고, 상대방의 얘기보다 내 얘기를 들어주려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미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조직에서 지도자들은 이미 스스로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애정을 준 다른 사람도 충분히 성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크게 증폭된다.  

이렇게 갈등이 증폭되는 이유는 ‘성숙’의 필요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간의 사랑에 필요한 성숙 수준과 단위 협동조합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성숙 수준과 협동조합의 중요한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성숙 수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공인에게 더 큰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그가 공적 지도자이기 때문인데, 협동조합의 주요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더 큰 성숙, 더 큰 비전, 더 큰 호연지기, 더 큰 인내심, 더 큰 포용심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협동조합의 주요 지도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공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성공의 경험은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과 이론에 대한 자기 확신을 더 강하게 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런 협동조합 주요 지도자의 마음은 좋은 의미에서 어느 정도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없다면 누가 더 큰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밤낮도 없이 뛰어 다닐 것인가? 당연한 일이다.  

협동조합 주요 지도자들의 갈등은 이 두 가지, 즉 상대방의 성숙성에 대한 높은 기대와 자기 확신이 강한 상황에서 상대가 나에게 맞추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맥락과 수준은 전혀 다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연애하는 풋내기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절망할 경우가 많다. 40이 되어도 숱한 번민에 괴로워하고 , 50이 되어도 천명을 알기 어렵다. 배신이나 실망감을 크게 외치는 것은 나의 협량한 마음, 크게 협동하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낼 뿐이다. 

불혹과 지천명은 성인의 반열에든 공자의 이야기이지 그렇지 못하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협동을 희망하려 한다면 오직 우리는 상대방과 더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해 말을 걸고, 삼가하고, 함께 어깨를 걸고 나의 두 발로 걸어갈 뿐이다. 그러다 다른 방향으로 가려한다면 충분히 소통한 후 그래도 가려 한다면 다시 만날 때만 기약하면서 잘 지켜봐 주면 된다. 협동은 인류 역사를 통해 발전해 온 것, 길게 볼 일이다.


2015. 07. 06

 

(사)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 김기태

2015/07/07 11:05 2015/07/0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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